Sunday, January 1, 2012

Siddhartha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으며, 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지혜를 지니고 다닐 수도 있으며,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부처가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의 여정을 소설 형식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작가는 진리는 가르쳐질 수 없다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형상화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진리'란 과연 무엇일까?

대학과 같은 고등교육 과정에서 진리나 지혜를 얻는다는 것을 모토로 삼는 것이 과연 옳은 말일까? 단지 지식 전달자로서의 기관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사회 속에서, 학교 속에서 사람들은 누군가로부터 지혜를 갈구하고 싶어한다. 이 책에서 '고빈다'라는 인물은 아마도 우리네 일반적인 소시민들을 형상화하고 있을련지도 모른다. 그는 벗인 싯다르타와 함께 구도의 길을 걸어가지만 부처의 길에 들어선 '고티마'의 사문에 들어가 진리를 얻고자 한다.

싯다르타는 어여쁜 기생에게, 장사꾼에게, 강과 뱃사공인 '바주데바'에게 또는 그에 못지 않은 자연 사물들을 스승으로 삼고 객체 간의 하나의 동시성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결과는 인생의 경험과 자아의 성찰로 인한 치열한 사고로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얻으려는 갈망을 놓아버려서 나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면 고빈다는 끝없는 구도의 길에서 항상 열반에 든 자를 동경하며 그의 가르침의 말을 좇아 그를 따르려고 노력하고 그에 도달하지 못할 때 불안해한다. 마지막에 싯다르타는 고빈다를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우리의 사유라는 것이 만사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고 달리 생각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지만, 그 죄인의 내면에는 지금 그리고 오늘 이미 미래의 부처가 깃들여 있다는 이야기다. 자네의 내면에 깃들여 있는, 아니 모든 중생 개개인의 내면에 깃들여 있는, 바로 그 생성되고 있는 부처를, 바로 그 부처가 될 가능성을 지닌 부처를, 바로 그 숨어 있는 부처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네.
깊은 명상에 잠긴 상태에서는 시간을 지양할 수가 있으며, 과거에 존재하였던, 현재 존재하고 있는, 그리고 미래에 존재할 모든 생명을 동시적인 것으로 볼 수가 있어. 그러면 모든 것이 선하고, 모든 것이 완전하고, 모든 것이 바라문이야. 따라서 나에게는 존재하고 있는 것은 선하게 보이며, 나에게는 죽음이나 삶이 다 같게 보이며, 죄악이나 신성함이 똑같이, 지혜로움이나 어리석음이 똑같이 보여. 세상만사의 이치가 틀림없이 그러하며, 세상만사는 오로지 나의 동의, 오로지 나의 흔쾌한 응낙, 그리고 나의 선선한 양해만을 필요로 할 뿐이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청춘콘서트, 멘토와 멘티 등등 어떤 지혜로운 자들을 상정하고 그를 존경하며 그를 닮으려고 한다.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책이 불티나게 팔리고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박경철의 여러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있는 것도 그러한 사회 분위기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렇게 책이 팔리고 사람들의 공감을 사는 동안 책을 읽은 사람들 중 어느 정도의 비율로 자신의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되씹어보고 나아가 세상에 대한 프리즘을 만들어낼까?

헤르만 헤세가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인 "진리, 지혜란 누구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인생사, 세상사, 그리고 주위 자연에 대한 깊은 관조로 얻어질 수 있는 것" 이 우리 같은 일반 소시민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

우리 내면의 자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고빈다와 같이 누구의 말을, 진리를 갈구할 필요가 없다.

묵묵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면서 마음 속의 부처를 찾아보자.
2012년, 나아가 나의 인생 전체에 있어의 마음가짐으로 삼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