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화려한 돌담에 얹혀있는 꽃들이 나를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는다. 여름의 화창한 일요일, 오랜만에 맑은 하늘이 나를 반기는 듯 하다. 하늘 위에는 햇살이 아늑하게 내 몸 주위를 감싼다. 마치 내가 무대의 주인공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듯 하다. 꽃들은 햇살을 받아 저마다 형형색색의 색채를 뽐내며 지나가는 손님들을 향해 자기를 돌아보라는 시늉을 한다. 가로수들은 그 동안의 비를 머금고 더욱 푸르러진 잎들을 드러낸다. 생생한 20대처럼 말이다. 꽃담 위의 건물엔 정원이 보인다. 몇몇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며 뻗어있다. 그네들은 어찌나 해를 갈구하는지 이번 장마 기간 동안엔 심심했을 것이다. 해바라기를 보면서 그네들은 한 대상만을 바라보며 서 있는데 나는 누구를 바라보며, 혹은 어떤 존재를 바라보며 서 있는지 궁금해진다. 뜨겁고 열정있는 그네들의 모습이 현재 자신감이 없고 위축되어 있는 내 모습과 비교되면서 부러워진다. 나는 해바라기처럼 될 수는 없는 것일까? 해바라기를 다시 보고 있자니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이 떠오른다. 고흐는 해바라기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삶을 반추했을 것이다. 한여름에 활짝 피어나서 격정적으로 한 대상을 사랑하는 모습을 강렬한 색채로 그려내다니 말이다. 멀리 다시 하늘을 바라본다. 햇살이 이제는 뜨겁다. 앞으로 나아갈 때이다.
미각
아이스크림을 냉동고에서 꺼낸다. 한 스푼을 꺼내어 살살 녹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퍼서 입가에 갖다 댄다. 입술에서부터 차가운 느낌이 들면서 동시에 아메리카의 바닐라 잎에서 싱싱히 캐는 인부의 모습이 그려진다. 혀끝을 살짝 대본다. 우유에 에스프레소를 섞은 라떼의 달짝지근한 맛이 마치 프랑스 파리의 한 골목의 카페에 내가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달달한 맛이 느껴짐과 동시에 혀를 마비시키는 부드러움이 내 몸을 휘감고 돈다. 아 이런 것이 참말로 바닐라의 맛이구나 느끼게 된다. 혀끝에서의 바닐라향이 점점 혀의 안쪽으로 침범해온다. 아 내 몸이 녹는 것 같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혀를 감싸고 돌면서 크로아티아에서 먹었던 젤라또가 문득 떠오른다. 그때도 무더운 날씨에 길거리에서 온가족이 하나씩 사서 입에 물고 다녔었지.. 어머니의 환한 웃음과 아버지의 장난치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와 동시에 지금 유럽에서 한창 여행중인 부모님이 생각난다. 지금 스위스에서 몽블랑을 보고 계시겠지.. 몽블랑에는 만년설로 만든 빙수가 두분의 미각을 마비시킬까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혀를 지나 이제는 목젖을 스치고 편도를 스치고 구인두로 넘어가는 아이스크림. 이미 내 혀를 마비시킨 향은 이제 식도의 초입부에서 위를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 있다. 마치 내 온 몸을 향기롭게 만들듯이.
후각
압구정 로데오에 있다. 사람들의 땀 내음내가 코를 찌른다. 허허벌판의 사막에서 석유를 캐는 인부의 찌릉내 나는 냄새는 아니고 열심히 수술하고 나서 가운을 벗을 때의 채취와 비슷하다. 모처럼 개었는데 다시 비가 쏟아진다. 지금은 밤 9시 반. 길거리에는 여자들의 향수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 각종 브랜드의 향수가 자극적인 네온사인에 맞추어 제정신을 못 차리게 한다. 비가 퍼붓는다. 어질어질한 향수 냄새가 비에 씻겨져 나가며 나의 마음도 평온해진다. 전화가 온다. 친구가 메인스트리트로 들어와서 삼거리에서 보자고 한다. 골목골목마다 카페에서 커피냄새가 나를 유혹한다. 이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고원에서 착취를 당해가며 인부들이 값싸게 넘긴 고생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남아메리카 콜롬비아에서 갱단의 돈냄새 또한 느껴진다. 썩은 생선 냄새이다. 친구를 만났다. 골목을 휘저으며 본능적으로 돼지들이 아우성치는 삼겹살집으로 향한다. 구워지는 고기 냄새가 소주의 시큼한 맛과 어우러져 마치 인생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청년실업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화려한 로데오에서 실업자의 모습이라니. 아니다. 분명 부잣집 한량 야타족의 차 기름 냄새는 아닌 것이다. 소주잔을 기울인다.
촉각
빨래감을 만진다. 일요일은 집안일을 하는 날이다. 질퍽질퍽한 수건의 푹신함이 붙어있는 머리카락과 동시에 만져진다. 다른 것을 집어본다. 수건의 습함에 찌는 속옷이 부들부들 만져진다. 원단이 참으로 좋은 소재로구나 생각하는데 만져보니 빵구가 나 있다. 이런, 하면서 얼른 속옷을 집어 쓰레기통에 버릴까 하다가 아니 이정도면 괜찮지 하면서 다시 빨래통에 넣는다. 다른 옷을 집어본다. 모시로 된 셔츠가 시원한 질감을 뽐내며 나를 만져보라고 손짓을 한다. 역시 수건 때문에 조금 축축하다. 마지막으로 양말을 만져본다. 덥게 느껴지는 두꺼운 면이 내 손에서 답답함을 뿜어낸다. 얼른 세탁기에 집어넣어버린다. 세탁기를 돌린다. 자 이제 설거지를 해볼까. 어제 씻지 않은 식기들이 가득차 있다. 어제 닭을 불러 먹었기에 양념으로 범벅이 된 그릇이 내 손에서 만져진다. 고무장갑을 낀다. 고무가 내 손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이 마치 타이어를 장착한 외제차가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듯하다. 세제를 묻히고 식기를 닦는다. 식기를 집으면서 물에 묻힌 그릇의 미끄러움을 느끼는 손이 방금 아이스크림을 먹은 혀의 심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설거지가 끝나고 소파에 털썩 앉는다. 소파의 아늑함이 내 엉덩이를 타고 전달되어 뇌에 각인된다. 저절로 몸이 반응하듯이 배게를 하나 붙잡고 눕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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