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8, 2011

나무 위의 남작(Il Barone Rampante)

동기 모형이 추천해줘서 읽은 책.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탈리아 작가인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 가 1957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잠깐 작가에 대해 소개하자면, 이탈로 칼비노는 보르헤스(Jorge Francisco Isidoro Luis Borges),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José de la Concordia García Márquez) 와 함께 현대 문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힌다고 한다. 칼비노는 쿠바에서 태어나 이탈리아로 이주한 작가로 2차 세계대전때 레지스탕스에 참여하였고 초기에는 공산당 활동에 전념하며 현실 참여를 목표로 하는, 네오리얼리즘적 성격이 강한 작품을 썼다고 한다. 곧이어 공산당 탈퇴를 하고 소설에서 이데올로기의 무게를 축소시켜 나가는 대신, 글쓰기 자체의 메커니즘, 텍스트 생산의 규율 자체의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문학적 의식을 확장시켜 나갔다고 한다.


나무 위의 남작은 주인공인 코지모 디 론도가 12살 때 괴짜인 누나의 달팽이 요리에 환멸을 느끼고 남작 아버지의 상류 귀족 사회로의 편입에만 골몰해 있는 것에 질려 나무 위로 올라가서 평생 지내겠다고 선언하고 정말로 그 후 50여년 남짓 평생 동안 나무에만 살아가면서 겪는 이야기를 그려낸 작품이다.

처음에 남작 가족들과 주위 농부들은 코지모 도련님이 곧 내려오겠거니 하는데, 나무 위에 살 집을 짓고 사냥을 하면서 먹을 것을 해결하자 놀라게 된다. 그리고 코지모의 신념을 꺾으려고 노력하지만 전부 헛수고로 돌아간다. 코지모는 집에 있으면서 절대 어울릴 수 없었던 산적 패거리들이나 동네 양아치 무리들과 어울리면서 그들과 동화되기도 하고 또는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기도 하는 등 자신이 그때마다 믿는 가치에 따라 무리들을 대하게 된다. 산적들과 어울리는 것을 중지하고, 그는 소작농들을 관찰하면서 그들에게 조언도 해주고, 사냥에 대한 팁도 제시하고, 책을 읽고 내면을 탐구하면서 그 시대(소설에서는 18세기로 그려짐)의 유명 철학가 e.g. 볼테르 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지내게 된다. 그리고 에스파냐까지 나무를 타고 건너가서 공화정을 지지하는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한다. 다시 고향은 옴브로사로 돌아와서는 어렸을 때 나무 위에서 봤던 '비올라'라는 후작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낭만주의를 견지하고 있어 이성으로 사랑을 대하던 코지모를 버리고 가게 된다. 코지모는 그 후 실의에 빠지면서 반 미치광이가 되었다가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그를 열렬히 지지하는 추종자가 된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물러나면서 그도 기력이 쇠해 나무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 참 줄거리 내가 써놓고도 두서가 없다 ;;; 이야기가 술술 읽히는 것이 아니어서 더 시간 순서대로 쓰기가 힘든 것 같다.
그냥 읽으면서 마음에 들었던 몇 가지 구절을 써 보겠다.


1> 코지모가 처음 나무위로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기로 선언하고 나서 마을의 후작가문의 소녀와 만났을때

... "물론이지! 이 위는 모두 내 개인 영토야." "나뭇가지 위는 모두 내 영토야. 어디 할 수 있으면 가서 날 잡으러 오라고 말해 봐!"
... "그네는 네 거지." "하지만 이 가지에 매달려 있으니까, 항상 내게 속해 있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땅을 밟고 있을 때는 네 영토에 있는 거고 네가 그네를 타고 공중으로 올라오면 내 영토에 있는 거야."
... "내게는 땅이란 다 똑같이 적이야. 넌 나와 함께 이 위로 올라올 수 있어."

2> 코지모 동생이 볼테르를 만났을때

..."그런데 당신 형은 왜 하늘 가까이, 그 위에서 사는 건가요?"
..."우리 형은 땅을 제대로 보고 싶은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옛날에는 자연만이 살아 있는 현상을 창조했는데 지금은 이성이 그 일을 대신하지요."

3> 코지모가 죽고 나서 동생의 회상

옴브로사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텅 빈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옴브로사가 정말로 존재했는지 자문해 본다. 이리저리 갈라진 나뭇가지, 잎맥이 섬세하고 끝도 없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는 나뭇잎들은 불규칙적으로 조각조각 섬광처럼 보일 뿐인 하늘 위에 펼쳐졌는데, 이는 아마도 우리 형이 물까치같이 가벼운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하늘은 마치 내가 페이지마다 잉크로 남긴 글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 위에 수놓인 것 같았다. 그 글은 삭제, 수정, 신경질적으로 갈겨쓴 글, 낙서, 공백으로 가득 차서 어떤 때는 굵고 깨끗한 씨들이 쏟아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작은 씨앗같이 미세한 표시들로 빽빽해지기도 했다. 어떤 때는 스스로 비틀어지기도 하고 나무나 구름으로 장식된 꽃봉오리 같은 문장과 연결되었다가 장애물을 만나 다시 비틀어지기도 하고, 또 달리고 달려 다시 풀려나가다가 마지막으로 의미 없는 말과 생각, 꿈의 실타래에 뒤얽힌 채 끝났다.


이를 테면 작가가 그려낸 코지모라는 주인공은 계몽 사상이 유행하던 시대에 최적화된 인간이라고 생각된다. 귀족 계습 사회의 고인 물을 거부하고 지식인으로서 남작이라는 알량한 작위에 의존하지 않고 소작농들의 삶을 직접 보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또한 저택에 갇혀 있거나 상류 사회의 무도회장에 안주하지 않고 이나라 저나라를 여행하면서 언어와 문화를 습득하고 사람들과 토론하고 사상을 교류하는 모습 또한 그것이다. 작가가 아마 남작을 나무 위에서만 지내는 것으로 그린 것이 땅이라는 기존의 사회를 거부함과 동시에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속속들이 그 사회의 단면을 바라보는 지식인의 참된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한다. 책 뒤의 작품해설에서는 '새로운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는 현대 사회에서의 지식인의 모습을 그려낸것' 이라고 하는데, 일견 동의하는 면이 없잖아 있지만 조금 해설이 거창한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작가가 1957년에 이 책을 낸 당시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간의 냉전이 한창일 때였을 것이다. 그 당시 인도나 남아공을 위주로 제3세계만의 독자적인 길을 주창하는 이들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냥 내가 생각하기엔 한때 공산주의에 빠졌다 돌아온 작가가 이러한 제3의 길(?)과 같은 노선을 지지하면서 소련이나 미국을 비판적 관점으로 바라봐야 된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너무 나아갔나.......

사실 21세기의 내가 50년 전의 이 작품을 읽고나서 느낀 점은 이 코지모라는 주인공이 정말 완고한 고집이 있구나 하는 것 뿐이었다. 사람의 신념이 갈대 같은 요즘에 이렇게 주위의 내려오라는 압박에도 불구하고 한평생 나무 위에서만 사는 이 주인공이 대단하게 느껴지지만, 세상이 휙휙 바뀌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사람이 사회를 살아갈 수 있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신념이라고 하면 좋은 의미지만 이를 다르게 해석하면 완고함, 고집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자신이 말을 던져 놓거나 약속을 하고 한순간에 손바닥 뒤집듯이 바꿔버리는 현 시점에서 이러한 고집은 오히려 반가울 수 있을 것이다. 컴퓨터, 인터넷, 휴대폰, 스마트폰 점점 발달하는 정보화시대에 전화나 문자로 한 말을 쉽게 취소하는 모습이 그리 달갑지는 않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만난다고 하면 집전화로 미리 약속을 잡고 그 때까지 나가야 서로 불편하지 않았기에 쉽게 취소할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완고함, 고집은 사소한 인간관계부터 일반 대중과의 약속도 포함될 것이다. 흔히 뚝심이라고 한다. 자신이 믿는 것을 계속 추진하는 능력.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대다수가 반대하지만 뚝심, 고집으로 밀고나가면 아집으로 보일 것이고 대다수가 찬성하지만 뚝심 부족으로 중도에 포기하면 위선으로 보일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광경이다.

코지모 남작의 신념, 고집도 그렇지만 위에서 관조하는 능력 또한 생각해 볼 일이다. 관조라는 것은 어떤 일에서 조금 떨어져서 지켜본다는 의미 아닌가. Professionalism의 자세와 일맥상통하지 않은가. 흔히 전문가 집단을 사회가 필요로 할 때는 이러한 능력을 보는 것이 아닐까. 그래야 일반인들도 전문가를 인정하지 않을까.

세상을 위에서 바라보면 더 잘 보이게 된다. 소용돌이에 직접 휘말리지 않으면서. 광우병이 2008년도에 난리였을 때 온갖 루머가 난무했을 때, 서울대 수의학과 우희종 교수가 나와 궤변을 쏟아낼 때, 의학적인 지식으로 무장하여 전문가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의협에서는 조심하라 --> 괜찮다고 말바꾸기를 하여 정부 눈치 본다고 공격받고, 그 당시 분당서울대병원의 치매 전문이신 김상윤 신경과 교수님 정도가 이러이러한 점에서 조심해야 하는데 실제 한우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고 pathology상 확인을 못해 단정을 짓지 못한다고 입장을 내놓았었다. 자칭 전문가들은 찬성 또는 반대의 입장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대변하였었다. 지식인은 yellow journalism, media frenzy에서 벗어나서 나무 위의 남작의 코지모처럼 나무 위에서 땅을 봐야 했었다.

세상을 위에서 바라보면 더 잘 보이는 것 외에도 더 넓게 볼 수 있다. 갈수록 specific해지는 전문지식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의대에서 가정의학과를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2년 전부턴가 자유전공, 융합기술전공 등 통합전공이 생겨났고 물리학과 철학의 만남, 의학과 예술의 만남과 같은 서적들이 인기를 끈다. 세부적인 것을 파는 것에 질려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방증이다. 전문가는 지식의 한우물만 파서 좋은 결과물과 논문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인식하는 사회의 폭을 넓히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진중권, 정재승, 조국 이런 사람들이 인기가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사람들이 자기 전공에서 얼마나 업적이 있는지는 노코멘트...).

하여튼 쓸데없이 길어진 감이 있는데, '나무 위의 남작' 이라는 책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책이었고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이 참 좋은 시리즈인 것만은 확실하다. 추천해 준 동기 OOO형에게도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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